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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차 노력형 슈터 김보미, 최고보다는 최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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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림

서태림 명예기자

17년차 노력형 슈터 김보미, 최고보다는 최선을!

 

 

지난 19일 삼성생명은 KB국민은행 Liiv M 2020-2021 여자프로농구 부산 BNK와의 정규리그 마지막 홈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수훈 선수는 바로 팀 내 최고참인 김보미였다. 3점슛 9개를 포함 29득점을 기록하며 15년만에 개인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을 세웠다. 

 

어느덧 프로 데뷔 17년차.코트 안에선 헌신적인 플레이로, 코트 밖에선 어린 선수들을 챙기며 모범을 보이는 그녀는 팀에서 꼭 필요한 존재이다. 플레이는 과감하고 터프하지만 환한 미소가 매력적인 김보미 선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본 기사는 지난 11월 휴식기 기간에 진행된 인터뷰입니다]

 

 

서태림 명예기자(이하 기자) : 지난 10월 25일 인천 신한은행과의 경기에서 무려 3566일 만에 더블더블을 작성했어요, 감회가 새로웠을 것 같아요.

 

김보미 선수(이하 김) : 그날은 마음가짐이 달랐던 것 같아요. 저희 팀이 그동안 신한은행과의 경기에서 많이 졌기 때문에 이기고 싶다는 마음이 컸어요. 또 이번 시즌 감독님께서 경기 시작 전에 선수들에게 질문하셨어요. 각자 평균 리바운드 몇 개 잡을 거냐고. 사실 가드나 포워드가 평균 5개를 잡는 게 쉽지는 않아요. 그런데 저는 정말 5개를 잡고 싶었고 감독님께 평균 5개 잡을 거라고 말씀드렸어요. 정말 잡을 수 있냐고 물어보시길래 정말 잡을 수 있다고 말씀드렸죠. 그런 의지가 게임에서 더 리바운드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이 되었고 유독 그날은 제 앞으로 공이 잘 떨어지는 날이었어요.(웃음)

 

기자 : 팀의 맏언니로서 부담감 혹은 고충도 있으실 것 같아요. 어린 선수들과의 소통이 어렵진 않으신가요? 

 

김 : 사실 제가 어렵기보다 어린 선수들이 저에게 말하기 더 어려울 것 같아요. 나이 차이도 많이 나다 보니까 어린 동생들에게 말을 많이 해도 부담스러울 수 있고 아무리 잘해주려 해도 후배 선수들은 불편하고 어려울 수 있거든요. 그래서 그런 부분이 많이 어렵더라고요. 어쩔 땐 저는 후배들을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그게 친구들한테는 부담이 될까 봐. 운동할 때 이게 잘못됐다, 이렇게 해야 한다 그런 잔소리 같은 말을 많이 하기 때문에 아마 애들한테는 항상 어려운 선배일 거예요. 그래서 더더욱 편하게 해주려고 노력을 해요. 예를 들면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있더라도 열 마디 중 한마디만 툭 던져놓고 가는 식으로요. 최대한 동생들이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일부러 농구와 관련된 얘기가 아닌 신조어, 맛집 이런 걸 물어보면서 편하게 얘기하려고 노력해요. 제가 그런 줄임말, 주변 맛집에 대해 정말 잘 모르거든요.

 

기자 : 유독 편한 후배가 있다면?

 

김 : 한비는 KB에서도 4년 정도 같이 있었고 여기 와서도 벌써 2년 동안 같이 있어서 편한 거 같아요. 또 명관이한테는 제가 막 말해요. 정신 안 차리냐고,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어쩌면 명관이에게는 제가 어려울 수 있는데 저는 되게 친근하게 느껴져요. 제가 가끔 뭐라고 하면 “여기 좀 보세요~”하면서 기합받는 자세로 서있어요. 누가 사진 찍어야 한다면서. 재밌어요. 선배가 어려울 수 있는데 명관이는 저에게 편하게 다가와 줘서 저도 그 친구를 친근하게 대할 수 있어요. 그래서 잔소리도 유독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김보미는 소아암 환자들에게 기부하기 위해 20cm 길이의 머리카락을 잘랐다.>

 

기자 : 김보미 선수의 대표적인 강점은 3점슛과 허슬플레이에요. 비결이 있을까요?

 

김 : 저는 슈터가 아니었어요. 제가 노력해서 만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타고난 슈터는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어느 정도는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슛은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진짜 노력하면 슛은 된다. 원래 고등학교 땐 3점슛은 안 쏘고 원드리블 점프슛, 투드리블 점프슛 아니면 드라이브인이 제 득점 루트였어요. 근데 프로팀에 와서 ‘내가 3점슛과 수비가 없다면 게임을 뛸 수 없겠다’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첫 연습경기를 뛰는데 감독님께서 기회를 주셨어요. 근데 슛이 없어서 슛 찬스가 왔는데 던지지 못했고 그때 감독님께서 슛 찬스에선 안 들어가도 던져야 한다며 혼내셨어요. 슛을 못 넣으면 그걸 넣을 수 있도록 네가 연습하는 거라고. 슛 찬스에 안 쏘면 게임에 투입을 안시키겠다고 하셔서 그때부턴 안 들어가도 계속 던졌어요. 3점슛을 하루에 천개씩 던졌어요. 선배들에게 자세 봐달라고 부탁하며 계속 연습을 했어요. 많이 쏘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고 자기 몸에 잘 맞는 폼을 찾다 보니 어느새 3점에 강점을 가지게 되었어요. 

 

첫 시즌에 느낀 점은 고등학생 때는 게임도 많이 뛰고 청소년대표팀도 하고 그래서 ‘내가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왔는데 여기서는 언니들하고 게임이 안될 정도로 실력 차이도 많이 나고 제가 할 수 있는 게 너무 없었어요. 그래서 어머니와 통화할 때 자주 울었어요. 그때 어머니께서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하고, (코트)밖에 있어도 내가 항상 베스트란 마음으로 있어야 한다. 코트에 들어갔을 때 최선을 다해라"라고 조언해주셨어요.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감독님께서 저에게 팀 연습중에 수비를 시키셨어요. 감독님께서 어떻게든 김영옥 언니를 따라다니며 수비하라 하셨어요. 그래서 그땐 정말 언니 한 명만 보고 계속 쫓아다녔고 심지어 잡다시피 하면서 다녔어요. 그렇게 열심히 하다 보니깐 수비할 때 저를 계속 기용해주셨고 그 잠깐이지만 코트에 들어가는 게 너무 좋았어요. 그렇게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다 보니깐 그 다음 여름 리그부턴 더 출전 시간이 길어졌어요.

 

사실 저 자신이 40분을 뛸 수 있는 선수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에겐 주어진 20분이 정말 소중했고 그 20분 동안 남들이 40분 뛸 만큼의 에너지를 쏟아내며 뛰었어요. 상대방이 지쳐서 못 쫓아올 정도로 뛰어다녔고 그렇게 뛰어서 그 시기에 국가대표도 했네요. 

 

https://youtu.be/ENwDOc_dKSU

 

기자 : 누가 도와줬나요?

 

김 : 예전에 우리은행에선 김은혜 언니가 잡아주고, 그때 항상 일본으로 전지훈련을 다녔는데 재팬 에어라인에 임영보 선생님이라고 계셨어요. 그때 제가 열심히 하니까 예뻐해 주셨어요. 열심히는 하는데 제가 슛이 없다 보니까 저에게 오셔서 툭 조언을 해주셨어요. ‘그냥 림에다 패스하는 거다. 근데 그거를 위로 올려서 포물선을 만들어서 패스하는 거다.’라고 기본 틀을 잡아주셨고 금호에서는 이언주 언니가 자세를 정말 잘 잡아주셨어요. 제가 타고난 슈터가 아니기 때문에 몸에 균형이 흐트러지면 무너졌어요. 그때 주변에서 언니들이 다리 쓰는 것, 골반 쓰는 것, 손 쓰는 것 등 자세를 정말 잘 잡아주셨고 지금도 김익겸 선생님께서 꾸준히 슛 폼을 잡아주세요. 주변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어요.

 

기자 : 어느덧 선수 생활 17년 차입니다. 농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기억나시나요? 

 

김 : 초등학교 4학년 말미에 스카우트가 왔어요. 그땐 선생님이 다른 학교로 스카우트를 하러 다니셨는데 어느 날 어떤 선생님이 교실로 오시더니 키가 150cm 이상인 사람만 손을 들라고 해서 손을 들었는데 제가 여자 중에 혼자였어요. 그때 저를 데리고 학교로 데려가셔서 농구 하는 걸 보여주셨는데 그게 참 재밌어 보였어요. 당시 집안 형편이 넉넉하진 않았는데 급식을 공짜로 준다는 말에 혹하기도 했고. 그렇게 시작하게 됐네요. 스카웃이 와서 갔는데 재밌어 보여서. 그때 저희 부모님이 반대하시기도 했는데 제가 하겠다고 해서 시작했어요.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저는 똑같은 선택을 할 것 같아요. 그때도 농구가 재밌어 보여서 시작할 것 같아요.

 

 

기자 : 2005년 드래프트 전체 3순위로 큰 기대를 받으며 프로에 데뷔한 후, 여러 차례 무릎 부상으로 많이 힘드셨을 텐데 멋지게 극복하신 후 지금은 팀의 주축 베테랑으로 자리 잡으셨어요. 어린 나이에 심리적으로 많은 부담감을 가지셨을 것 같아요. 

 

김 : 총 4번 수술을 했어요. 처음 두 번(반월판)을 수술하고 나서 몸이 안 올라오더라고요. 몸이 내 말을 안 듣는다는 게 느껴지니까 정말 무기력하고 힘들었어요. 이후에는 십자인대도 끊어졌고 마지막엔 반월판을 꿰맸던 실이 뜯어졌죠. 오른쪽 두 번, 왼쪽 두 번을 수술했어요. 25살부터 거의 1년마다 수술을 했죠.

 

사실 저는 40분 뛰는 선수가 아니고 20분 뛰는 선수라 벤치에서 왔다 갔다 하니깐 ‘그래도 나는 게임을 안 뛰는 선수들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는데, 수술을 2번하고 십자인대 수술을 하면서 완전히 게임을 못 뛰게 되면서 그 친구들이 얼마나 힘들지, 심적으로 스트레스일지 정말 피부로 와닿았을 정도로 이해를 했어요. 예전엔 머릿속으론 이해한다면서 ‘왜 더 노력을 안 하지? 더 해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했다면 그때 제가 벤치에 오래 앉아있으면서 되게 무기력해지고 내가 해야 된다, 해야 된다 하면서도 그게 안 되는 거예요. 그때 게임을 못 뛰는 선수들의 심정을 되게 많이 느꼈고 그러면서 조금 더 이해하게 되고 더 그 친구들을 품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전에는 억지로라도 끌고 가려 했다면 이제는 조금 유해졌다고 해야 하나. 그 시기가 당시에는 많이 힘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제일 많이 배우고 어른스러워진 것 같아요. 

 

기자 : 총 4번의 수술을 하고 운동능력이 많이 떨어졌을 것 같아요. 

 

김 : 많이 떨어졌죠. 그래서 수술을 하고 웨이트 트레이닝 방법을 많이 바꿨어요. 그전에는 근육을 무조건 많이 그리고 크게 키워야 하고 무게도 최대한 많이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턴 무게를 가볍게 들더라도 자세를 완전히 정확하게 하는 방법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통증이 있다면 무게를 가볍게 하거나 맨몸으로 해서 제가 제 몸을 컨트롤 할 수 있도록 했어요. 저만의 웨이트 방식을 감독, 코치, 트레이너분들이 다 이해해주셨고 그렇게 바꾸다 보니 확실히 덜 다치고 몸도 좋아졌어요. (2편에서 계속)

 

글 – 서태림 명예기자                   

사진 – 이진호, 김은서, 하우종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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