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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무덤덤하게 일상으로 다가온 농구 - 배혜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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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근

정재근 명예기자

무덤덤하게 일상으로 다가온 농구

 

“농구는 자신감이잖아요. 뭐라도 되겠죠.”

 

이 말을 가볍게 웃으며 뱉을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농구에 대한 열정 그리고 자신감으로 팀원들을 다독이고 팀의 성장에 가장 큰 기여를 하고 있는 블루밍스의 주장 배혜윤이다. 2013년 블루밍스로 이적하여 언니들에게 의지하던 그녀는 어느새 16년차 베테랑 선수로서 후배들을 이끌고 있다. 그런 배혜윤의 농구 일대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배혜윤과 농구. 어쩌면 우연일 수도 있지만 배혜윤에게 농구란 운명이다. 럭비 선수출신 아버지와 농구 선수출신 어머니의 피를 물려받은 그녀에게 농구는 당연하게 다가왔다. 평범했던 어느 날, 그녀에게 농구는 우연처럼 다가왔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는 우연보다는 운명인 거 같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농구 권유에 대한 연락이 오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그냥 하게 된 거죠.” 당시 공부에도 운동에도 큰 흥미가 없던 그녀는 무심결에 하게 됐다며 말문을 열었다.

 

운동에 대한 좋은 유전자와 키를 받은 배혜윤은 어릴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을까.

 

“초등학교 때의 농구?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딱히 잘했던 기억도 없고 대회에 나갔던 기억도 없어요.”라며 농구에 큰 흥미가 없었다고 밝혔다.당연히 농구 선수에 대한 열정도 없었다. “근데 제가 농구 선수가 될 거 같다고 느꼈을 때는 제가 자꾸 수업에 집중하기 보다는 농구를 하고 있더라고요?(웃음) 그때부터 장래희망으로 ‘농구 선수’를 적기 시작했어요.”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키는 큰 편이었고 중학교 때 벌써 178cm였어요.” 계속해서 키가 크기 시작했으나 동시에 쉬지 않고 운동을 하다 보니 무릎부상이 와버렸다. 철강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배혜윤에게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지만 그때가 첫 부상이었다 .그녀는 병원에서 1년 이상을 쉬어야 한다는 진단을 받고 휴식을 취했다.휴식을 취하는 동안 그의 동기들은 하나 둘 농구를 그만두며 홀로 남았다.

 

 

 

홀로 남겨진 배혜윤이 농구를 계속할 수 있었던 버팀목은 무엇이었을까. 그녀에게 농구는 ‘일상’이었던 것이다. 딱히 목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에게 농구는 일상이기에 꾸준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사춘기도 없었던 거 같아요. 버팀목으로 의지할 만한 것도 특별히 없었고 그냥 했어요 그냥…음 갑자기 떠오른건데 농구 동기들, 후배들이 참 좋았어요. 열심히 농구하고 즐겁게 얘기하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어린 시절 마음 맞는 친구와 같은 관심사를 두고 하루 하루를 지내는 것은 모두에게 큰 힘이 된다. 이것은 배혜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배혜윤이 본격적으로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때이다. 꾸준히 달려온 배혜윤이 빛을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3월, 춘계연맹전 결승전에서 총 34득점(연장전에서 11득점) 24리바운드를 기록하며 MVP로 선정됐다. 지금 생각해도 이 기록은 어마어마한 기록이다. “정말 훈련을 많이 했어요. 하루의 시작이 농구였고 하루의 마무리가 농구였으니까요. 오죽하면 연습 게임을 하러 오시는 분들이 저희를 보고 불쌍하다고 했을까요.” 우승을 못하면 이상할 정도로 훈련에 매진한 그녀는 MVP까지 수상하며 슬로바키아 대회까지 출전하게 됐다.

 

 

 

그렇게 배혜윤 농구인생에 터닝포인트를 맞이했다. 춘계 연맹전뿐만 아니라 U-19국가대표로 선발되어 첫 국가대표로 2017 FIBA U19 세계선수권에 출전했다. 특히 아시아 여자 농구 최강국이라 할 수 있는 중국전에서 20득점(6/10) 6리바운드 6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승리로 이끌기까지 했다. 세계 대회를 준비하며 특별히 신경을 쓴 부분에 대한 질문에는 “뭘 준비해요. 그냥 하는 거지.매일 똑같이 훈련했죠.”라며 웃었다.

 

이어 “춘계연맹전 당시 코치님이 저를 믿어주셨어요.그 코치님 덕분에 골을 어떻게 하면 넣을 수 있는지 알게 됐어요. 근데 슬로바키아 대회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춘계연맹전에서 꽃을 피운 그녀에게 마냥 꽃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슬로바키아대회가 마지막으로 끝난 후 배혜윤의 드래프트는 5순위로 밀리고 말았다.

 

하지만 불안해하지 않았다. 순위에 영향을 받지않고 ‘꾸준함’을 추구했다.

 

“농구를 하면서 쉴 때마다 우리끼리 드래프트를 앞두고 칠판에 가고 싶은 구단을 적고 그랬는데 사실 저는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마음이 복잡하긴 했지만 별 생각을 안하고 지냈어요.” 2008년 신인 드래프트 시절에는 드래프트 현장에 고등학생 선수가 지금처럼 필수로 참석하는 시절은 아니었다. 그래서 따로 드래프트 선발 사진 또한 없다. 그녀는 그저 본인의 호명여부에 대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마침내 2008년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5순위로 지명을 받았다. “안 떨릴 거 같았어요. 근데 프로행이 확정되고 기분이 좋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걱정이 됐어요. 많이 떨렸던 거 같아요.” 본인의 이름이 호명되고 떨림으로 가득 찼다고 말했던 것과는 달리 그녀는 신인상까지 수상했다.

 

 

“프로 무대는 걱정했던 것보다는 덜낯설었고 출전 기회를 받으면서 부담도 점차 없어졌어요.” 갓 데뷔한 신인임에도 배혜윤은 25경기 평균 17분 27초를 소화하며 한경기 평균 5득점 3.7 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신인상을 수상했다.“ 신인상을 탈 때는 기분이 좋았죠. 근데 신인상을 타고 처음으로 ‘앞으로 어떡하지.’하는 부담감이 들었어요. 마냥 만족하고 행복한 신인 시즌은 아니었어요.” 처음으로 배혜윤이 직접 부담감이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많은 득점을 내고 신인상도 탔지만 고등학교 선수시절과는 확연히 다른 훈련 분위기와 문화에 적응하기가 신인에게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첫 해에 좋은 활약을 보여줬지만 동시에 부담감을 느꼈던 그녀는 프로에서의 첫 해가 지나고 차근차근 적응해 나갔다.

 

2013년 5월, 배혜윤에게 슬럼프가 찾아왔다. 그녀는 “저 스스로에게 한계를 느꼈고 대학이라는 꿈도 점점 커지기 시작했어요.”라는 말과 함께 은퇴를 선언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농구는 ‘일상’이다. 농구를 하며 힘든 일도 있었고 속상한 일도 있었지만 그의 인생에 농구를 뺄 순 없었다. 8월 트레이드로 삼성생명으로 팀을 옮기면서 은퇴 의사를 철회하고 선수 생활을 다시 이어나갔다.

 

- 2편에서 계속 -

 

기획/기사 - 정재근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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